[아름다운사회] 멍의 귀환, 소환

[김재은 대표]

오랜 기억을 소환해 본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봄볕이 참 좋은 날, 교실 창가에 앉아 칠판 대신 창밖의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다 선생님한테 혼이 났던 기억이 생각났다. 특별히 창밖을 바라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때만 해도 ‘공부, 공부’하며 다그치는 사람도 없었는데 내 딴에는 삶의 여유가 필요했었나 보다. 그땐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절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각박하고 야박하진 않았다. 그리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정도가 덜 했던 때인지라 ‘멍하게 있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세상을 제대로 사는 것 같지 않은, 바쁨과 일에 빠져버린 이 기이한 삶이.
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덕유산에 눈이 왔다는 소식에 친구들과 한달음에 달려가 환상의 설국에 빠져 하얀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시간, 며칠 뒤에 제주 올레길을 걸으며 먼 푸른 바다를,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며 온통 눈으로 덮인 삼나무 숲을 넋이 나간 듯 응시했던 순간이 그대로 살아있다. 무엇보다 나의 오감의 촉수들이 꿈틀대던 그 생동감 있는 느낌들을 어찌 잊겠는가. 여유가 있는 삶, 멍한 일상의 특별한 축복이 내 삶에 깃든 것이리라.
작년 8월, 코로나로 쉬었던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3년 만에 다시 열렸다고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가치 있는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현대 미술작품(퍼포먼스 아트)이다. 다행스럽다고 생각해야 하나.
‘멍한 삶’이 쓸데없는 것,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 시대에 균열을 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여유 상실의 삶의 풍경에 마음이 짠해오기도 하고.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삶이 진정 내가, 우리가 꿈꾸는 삶일까를 반추해 보면 이 ‘멍 때리기’는 우리와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전에 비해 스스로 삶의 여유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과 돈, ‘그래야만 하는 생각의 틀’에 길들여진 삶에까지 여유의 바람이 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멍 때리기 조차 ‘효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극성스러운 결과 지향의 삶이 시퍼렇게 살아있으니까 말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과 세계의 운명을 성찰하고자 한 작가, 헤르만 헤세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떠올리니 멍 때리기는 삶의 돌아봄이나 성찰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쉼 없이 일이나 뭔가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 바쁜 일상 속에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멍 라이프’를 예찬하며 멍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참 편안하고 좋다.

뜬금없이 멍 때리기를 소환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