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핫라인] 우리는 서로의 회복에 책임이 있습니다

김성경 KAN-WIN 옹호 상담가
게렛 신학교 목회 상담학 석사, 게렛 신학교 목회신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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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회복에 책임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임마뉴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는 윤리는 타자 (다른 사람)와의 만남에서 시작되며, 인간은 이미 서로에게 책임을 가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며, 타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나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대니얼 시겔 (Daniel J Siegel) 은 그의 대인관계 신경생물학 (Interpersonal Neurobiology) 이론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 단순히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된다고 봅니다. 반복적인 상호 조절이 신경 회로를 강화하여 뇌의 구조적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정서조절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철학과 신경생물학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두 관점은 놀랍게도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며, 다른 사람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나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가정폭력, 성폭력, 자연재해, 전쟁, 인종차별적 공격 등 공포스러운 일을 겪을 때,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누군가는 싸우거나 도망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서적, 신체적으로 완전히 멈춰버리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장기적으로도 어떤 사람은 그 경험을 상대적으로 상처 없이 지나가지만, 또 다른 사람은 그 경험을 온몸으로 되새기며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고통받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나 폭력을 경험한 사람 중 일부만이 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것입니다.
개인이 고난을 겪으면서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도록 견디는 능력을 회복탄력성(resilience)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회복 탄력성이 다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각자의 신경계 반응과 스트레스 처리 방식 때문이지만, 동일하게 중요한 또 하나의 변수는 “내 주변 사람들이 나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입니다. 트라우마 사건 직후 내가 만난 사람과의 관계, 공동체의 반응, 그리고 내 관계망 속의 사람들의 지지가 회복탄력성 형성에 깊이 관여합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깊습니다. 많은 사람은 트라우마를 고백하는 것이 나약함이나 결함처럼 보일까 봐 두려워하고 인정하기를 꺼립니다. 그래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그냥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트라우마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몸속, 신경계 깊은 곳에 기억되어 있다가 통제되지 않는 분노, 공격성, 슬픔, 위축 등의 모습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사회 윤리와 공동체의 역할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판단 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그 고통이 요청하는 사회적 책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하나의 사물이나 정보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비교하고 평가하고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은 그 사람을 침해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무응답은 늘 구조적 실패로 이어져서, 폭력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침묵을 강요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2차 피해를 양산해 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안전하지 않은 공동체의 전형이고,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면 타자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공동체, 타자의 고통에 침묵하는 공동체, 즉 비윤리적인 공동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인간성도 훼손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주하는 우리의 책임은 관계적 안전을 만들어 주는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그 사람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표정, 목소리 톤, 움직이는 속도 등을 조절하며 안전한 신호 보내기, 생존자의 속도를 존중하기, 생존자가 선택권을 가지도록 돕기 등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윤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가정폭력, 성폭력의 생존자는 문제 해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윤리적 실천은, 고유한 역사와 감정과 몸을 가진 독립적 존재인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안전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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