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윗논에 물이 있으면 아랫논도 물 걱정 않는다
[한희철 목사]
괜히 마음이 든든한 경우가 있습니다. 쌀독에 쌀이 가득하다든지, 광에 장작이 높이 쌓였다든지, 통장에 잔고가 넉넉하다든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불원천리하고 달려와 줄 친구가 있다든지, 어디를 가자고 해도 기꺼이 동행이 되어줄 사랑하는 이가 있다든지, 그냥 마음이 든든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든든한 것 중의 하나가 물이 넉넉한 윗논을 가진 아랫논입니다. 농사는 한 마디로 하늘 눈치를 보는 일입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사람의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맙니다. 하늘이 도와주어야 할 것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물입니다. 꼭 필요할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타 죽어가는 것이 곡식뿐만이 아니어서, 농부의 가슴은 거북이 등짝처럼 변한 논바닥보다도 더 깊이 갈라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이 없는 논이 있습니다. 윗논에 물이 그득한 아랫논입니다. 찰랑찰랑 윗논에 물이 가득 차 있으면 아랫논은 물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물꼬만 트면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것이 논뿐이겠습니까,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엣 사람이 넉넉한 물을 지니고 있으면 아랫사람이 든든한 법입니다. 윗세대가 넉넉한 물을 품고 있으면 아랫세대는 덩달아 마음이 든든합니다. 내가 부족할 때에도 쳐다볼 곳이 있고,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따를 만한 어른이 곁에 있다는 것은 더없이 든든하고 고마운 일이 됩니다.
우리는 말라 있는 아랫논을 보고 물이 말랐다고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보기가 안 좋다고, 꼴이 그게 뭐냐고 힐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보아야 할 것은 아랫논만이 아닙니다. 아랫논보다도 윗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윗논에 물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윗논에 물이 없어 말라 있다면 비난받아야 할 것은 아랫논이 아니라 윗논입니다. 아랫논으로 물을 대야 할 윗논에게 더 큰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이태원 할로윈 축제 사고는 너무나도 마음을 무겁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0명이 넘는 이들이 압사를 당했다는 소식은 실감도 나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이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자식들의 생사를 몰라서, 연락이 끊긴 자식을 어느 병원에서 찾아야 할지를 몰라서 망연자실하는 부모님들의 모습도 마음이 아팠지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더 있습니다. 사망자 중 10대와 20대가 많다는 소식입니다.
왜 그런 곳에 갔느냐고 젊은이들을 탓하는 것은, 아랫논을 탓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깊은 절망과 공허함이 젊은이들의 걸음을 그리로 이끈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큰 비극 앞에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아랫논이 아니라, 아랫논에 희망의 물을 대지 못하고 있는 윗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