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상상의 정원을 걷다

[이규섭 시인] 

황제의 침실 덕수궁 ‘함녕전’ 대청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함녕전은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한 뒤 1919년 승하할 때까지 머문 침전으로 평소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다. 침전의 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렸고 스크린 같은 하얀 벽면에 고종이 꿈꾼 상상의 정원이 몽환적으로 펼쳐진다. 조선 후기 상상의 정원인 ‘의원(意園)’을 차용한 작품 ‘몽유원림(夢遊園林)’이 흐른다. 애니메이터 이용배와 조경학자 성종상이 공동 제작한 영상으로 짧지만 여운은 짙다. 망연히 정원을 바라보는 고종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나비의 날개 짓이 허망하다. 

참선을 하듯 심호흡하며 눈을 감는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황제가 토해내던 통한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12살 어린 나이에 용상에 올라 격랑의 구한말을 온몸으로 겪은 그가 마음을 기댈 곳은 자연이 숨 쉬는 정원이 아니었을까. 고종은 침전에 늘 ‘보료 3채’를 깔아놓았다고 한다. 경복궁 후원을 함께 거닐던 민비와 아관파천 때 동행한 엄비의 채취를 보료에서 느끼려 했을 것이다.

함녕전 대청마루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전시회 덕분이다.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에는 현대미술가 뿐만 아니라 조경가, 만화가, 식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전시의 폭이 넓다. 작가들은 덕수궁과 함께해 온 식물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영상, 조각, 설치, 전통공예, 조경, 만화영상, 식물 세밀화 등의 작품을 덕수궁 곳곳에 숨은 그림 찾듯 전시해 놓았다.

석조전 정원 잔디밭에는 윤석남 작가가 폐목을 잘라 만든 조각상 ‘눈물이 비처럼, 빛처럼: 1930년 어느 봄날’이 놓여 있다. 선택받은 소수만 출입할 수 있었던 궁궐에 이름 없는 조선 여성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조각하여 근대기 여성들의 의지를 담아냈다. 80년 된 두 그루 노거수 아래 전시되어 묘한 일체감을 준다. 작품을 받쳐주는 제목이 빛처럼 빛난다.

즉조당과 준명당 앞 정원 한가운데 사슴 한 마리가 검은 눈망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사슴의 뿔 위로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뻗어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로 조각가 김명범의 작품 ‘원’이다.

2층 목조 전각 ‘석어당’ 대청마루엔 ‘홍도화’가 붉게 피었다. 조선 왕실은 생화로 실내 장식하는 것을 금했다. 명주와 모시 등으로 만든 화려한 조화를 궁중 의례와 향연에 사용했는데 이를 채화(綵華)라고 한다. 황수로 작가가 천연물감으로 염색한 비단과 모시, 송홧가루와 매화나무 가지를 이용한 작품이다. 선혈 빛 채색에 눈이 시리다.

함녕전 행각에 전시된 ‘면면상처: 식물학자의 시선’은 덕수궁에서 채집한 식물들을 표본과 그림, 글 등으로 세밀하게 담아냈다. 뿌리를 드러낸 붓꽃 표본에서 파란만장한 궁궐의 민낯을 보는 것 같다. 특히 망초 표본은 대한 제국이 망한 뒤 온 나라에 퍼져 ‘나라가 망할 때 돋아난 풀’로 덕수궁에 깃든 아픈 역사를 느끼게 한다.

사각의 틀 안에 갇혀있던 미술이 진화를 거듭하며 다양한 형태로 다가와 깊어 가는 가을 정취를 풍요롭게 수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