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사회] 남자는 필요 없고 여자 나와라

[한희철 목사]

두툼한 앨범을 넘기듯 마음을 살피면 오랫동안 멈춰 있던 시간 같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애써 노력을 해도 최근의 일들은 잘 잊어버리면서도,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으니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특히 유년의 시간이 그렇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옛일, 그런데도 어릴 적 시간들은 겨울잠을 자듯 마음에 남았다가 봄 맞은 듯 불쑥 살아옵니다. 오랫동안 발아를 기다려온 씨앗들이 비를 만난 것처럼 고개를 듭니다. 

고향의 산과 개울, 저수지와 호수,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반짝반짝 윤이 났던 골목길, 지루함이라고는 모르고 날마다 뛰놀던 친구들, 자치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 돌멩이와 막대기와 종이만 있어도 충분했던 기가 막힌 놀이들, 동네 자명종 역할을 했던 예배당 새벽 종소리, 계절마다 먹을 것을 새롭게 내주었던 뒷산,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납니다.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 중에는 매일 저녁 반복되던 소리도 있습니다. “야, 야, 애들 나와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나와라!” 다른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동네를 두어 바퀴 돌면 깻단에서 깨 쏟아지듯 아이들이 몰려나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을 불러냈던 것은 숙제를 먼저 마친 아이들 몫이었습니다. 

소리는 소리를 부르는 법, 동네를 도는 소리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야, 야, 애들 나와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나와라!” 소리가 지나고 나면 노래의 2절처럼 이어지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야, 야, 애들 나와라! 남자는 필요 없고 여자 나와라!” 서로를 불러대는 두 소리는 마치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쪽이 높아지면 질세라 다른 쪽이 높아지고는 했으니까요. 아이들이 모이면 남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대로, 여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 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시간을 즐겼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놀이는 땅거미가 깔려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그때쯤이 되면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저녁연기 퍼지듯 매일처럼 울려 퍼지던 소리, 밥 먹으라 부르는 엄마들의 소리였습니다. 마치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듯 동네 아이들 이름이 동네에 퍼졌습니다. 자기 이름을 서너 번 듣고서야 내일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아쉬운 걸음을 돌렸습니다.

지금도 마음속에는 그 소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부르던 소리, 밥 먹으라 부르던 엄마들의 소리, 모두가 그리운 소리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들을 수가 없는 소리입니다. 함께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흥겨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고향이란 소리가 살아있는 곳입니다. 날 부르는 친구들의 소리가 있고, 밥 먹으라 부르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있는 곳이지요. 골목에서 이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뜻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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